넋두리

군무부장 약산 김원봉 장군

산동1 2022. 9. 7. 14:10

김원봉(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대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임시정부 군무부장)

  약산(若山) 김원봉은 1898314일 밀양군 부내면 내이동 901번지에서 아버지 김주익 어머니 이경념의 11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봉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웃에 살던 석정 윤세주 아버지 윤희규 선생께서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밀양공립보통학교와 사립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 중앙학교에서 수학하고, 천진(텐진, 1916)의 덕화학당에서 중국어와 독일어를 그리고 남경의 금릉대학 영문과(1918)에서 공부한 엘리트이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시절인 1910년에 석정 윤세주 등과 더불어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날(1910113) 일장기를 학교 변소에 처넣어 퇴교를 당하였고, 그 후 을강 전홍표 선생님이 설립한 사립 동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으로 이 학교마져 폐교(1912)되자 표충사에 들어가 독서와 체력을 단련하였다. 이후 1916년 서울의 중앙학교에서 학업을 지속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여성(如星) 이명건, 약수(若水) 김두전과 만나 백민 황상규의 주선 하에서 동지적 맹세를 하였다. 여기에서 약산이라는 호를 갖게 된 것이다.

이후 고모부 황상규의 만주행 요청을 받았다. 무력으로 강도 일본을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주로 향하던 중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원봉은 통하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약산은 석정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한봉인을 만났고, 이종암, 장지락 등과도 조우하였다. 그해 9월 퇴교(졸업)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19191110일 길림시 파호문 밖에 있는 평화로 57번지 반씨의 농가에서 의열단(창단 당시 단원 13김원봉, 윤세주, 이종암, 곽재기, 신철휴, 한봉인, 이성우, 김상윤, 강세우, 서상락, 배동선, 한봉근, 권준)을 조직하고 의백으로 선출 되었다.

1920년 봄 의열단의 본부를 북경으로 이동시켰고, 도산 안창호의 도움으로 폭탄 제조 원료를 구입한 뒤 폭탄을 제조하여 본격적인 의열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의열단 제1차 암살파괴활동인 밀양폭탄사건(19206, 윤세주, 이종암, 곽재기, 신철휴, 한봉인, 이성우 이상윤, 강세우, 고인덕 등 16명 체포)과 부산경찰서폭탄사건(1920914, 박재혁 옥중 단식으로 순국), 밀양경찰서폭탄의거(19201227일 최수봉 대구형무소에서 192178일 순국), 조선총독부폭탄사건(1921912, 김익상),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미수 사건(일명 황포탄 사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1923),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 폭탄사건 등 23회에 걸쳐 침략자 일본을 응징하는 의열활동을 지도했다.

1925년 의열단의 활동 방향을 무장투쟁으로 바꾸고 의열단원들과 함께 중국 국민혁명의 진원지인 광동으로 이동하였다. 19261월 황포군관학교에 최림이라는 가명으로 입학하여 제4기로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어 군관학교 군관단에 배속되었다. 19274월 장개석의 반공쿠데타 이후 상해를 거쳐 무한으로 이동하여 의열단을 재정비하였다. 1929년 봄 다시 북경으로 옮겨와 안광천 등과 함께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19304)하여 청년 간부를 양성했다. 그 무렵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결성에 참여하고 정치학교 졸업생을 국내에 파견하여 국내의 노동대중운동에 합세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에(1931) 레닌주의정치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던 박차정 의사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19319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 본거지를 남경(南京)으로 옮겼고 193211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을 주도했다. 19321020일부터 1935105일까지 남경에서 장개석 국민당정부와 제휴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하고 3(1-선수암, 2-증조사, 3-천령사)에 걸처 청년혁명 간부 125명을 양성했다. 1기생에는 이육사(이원록), 2기생에는 중국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이 있다.

193575, 약산은 조선민족혁명당(지금 남경대학인 금릉대학의 대례당)을 창당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서기부장을 맡았다.

19381010, 무한에서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제13기 졸업생을 규합하여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총대장에 취임하였다. 무한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1938.12.12.)되자 약산은 조선의용대 본부 인원을 이끌고 강서성 계림으로 이동하여 대원의 가족들을 보호하였고, 각 전구를 돌며 대원들을 격려하였다.

1940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경상도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가담하였다.

1940114일 개최된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화북지방으로 북상 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111일부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본격적으로 북상을 개시하였으며, 약산이 이끄는 본부지대는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19415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약산은 제1지대장이 되었다. 19444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여 임무를 수행중 중경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얼마 남지 않은 1944527일 그의 아내 박차정 여사가 전투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19451월 항일투쟁가 최석순의 딸 최동선과의 결혼하였다. 최동선은 박차정 여사를 돌보며 3.1소년단을 이끌던 사람으로 박차정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약산과 혼인하게 되었다. 이후 중경에서 안중근의 이름을 딴 맏아들 중근을 얻었다.

1945122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자격으로 귀국한 약산은 고국을 떠난지 29년 만에 돌아와 전국군사준비위원회 산하 기구인 조선국군학교의 교장으로 추대된 약산은 "국군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군대가 되지 말고 이들을 배제한 옳은 노선 위에서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을 위한 인민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6년 꿈에도 그리던 고향 밀양으로 오게 되었다. 창녕에서 밀양으로 넘어오던 약산 일행은 인교 근처부터 인파들이 몰려들었고, 땀나는 비석으로 알려진 표충비각 근처에서는 도저히 차로 이동할 수 없어 내려서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무안 고개에서부터는 브라스밴드까지 동원된 고향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밀양으로 향하였고, 감내 부근부터는 아예 걸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인 27일 밀양초등학교에서 수만 군중의 환영을 받고, 연설을 통해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활약을 소개하였다. 1947329일 약산은 파업 관련 혐의로 미군정 소속 친일 경찰 노덕술에 의해 구속되어 42일 포고령 위반으로 미군정이 실시한 군사법정에 섰다. 중부경찰서로 잡혀간 약산은 노덕술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1947719일 몽양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장례위원장을 맡아 장례를 주관하였다. 1948년 평양에서 개최된"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입북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약산은 419일 연석회의에서 축사를 하였고, 423일에는 사회를 맡았다.

약산이 북으로 떠나기 전 중경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내던 시절 자신의 비서로 있었고 상해에 살고 있던 사마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군자금 모집에 불응하여 의열단원(광복회) 권중이 단죄한 장승원의 아들이 당사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었다. 그의 부하인 수사과장 노덕술이 감정적으로 약산을 체포하여 감금한 뒤 모욕적인 언사로 괴롭혔던 정황, 그리고 약산을 찾아간 두 동생을 감금하여 고문하는 등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던 상황으로 볼 때 최고의 애국지사가 이 땅에서 대접을 받고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어린 두 아들의 안위마저 염려가 되었던 정황을 고려할 때 약산의 북쪽행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쫓겨간것이 아닌가 한다.

북쪽으로 간 약산은 19489월 북한에서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52년에 노동상,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 부위원장 등을 거치면서도 나름대로 민주적 단일 정부 수립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약산이 가졌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8년 말경 "국제간첩" 혐의를 입고 숙청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생사를 헤아릴 길이 없다.

  도서관에서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 읽기를 좋아하고 톨스토이의 작품이라면 무엇이나 읽었던 약산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사실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이름난 문학가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그 어느 누구와도, 그리고 어떤 사상이라도함께 할 수 있었던 약산에게 자발적 월북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장관급 이상을 역임하였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를 내몰았다. 그래서 약산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방인이다.

약산의 막내 여동생인 김학봉 여사는 생전에 2000년도가 되기 전까지 "약산 김원봉이 내 오빠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고 했다. 김학봉 여사는 조카들의 생사를 아는 것과 약산 훈장 서훈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약산의 독립운동 발자취와 공적

신흥무관학교 수학 의열단 단장 황포군관학교 수학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 레닌주의정치학교 교장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교장, 대일선전통일동맹 상무이사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민족전선연맹 이사, 조선의용대 총대장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사령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워원 겸 군무부장 환국 통일독립국가 건설에 전력하다 이북 행

현재까지 미서훈이지만 의열투쟁, 민족간부 양성, 혁명정당운동, 민족전선통일운동, 항일군사운동, 독립전선 외교활동, 심지어 광복 후의 신국가 건설에서도 백범 김구보다 늘 한발 앞서가면서 적어도 쌍벽이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한 거인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