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독립 운동사
밀양의 독립운동
1. 밀양 독립운동의 배경
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나기 전 우리나라의 민족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변혁운동으로 1880년대의 개화운동, 1890년대의 독립협회 활동,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 등이 여기에 속하며 당시대의 지식인들이 중심이었다.
또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으로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1900년대의 의병항쟁 등이며 민중지향적 성격이 대체로 강한 편이었다.
첫째. 밀양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10년부터 시행된 토지조사령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로 일본인들의 토지 매입이 가능해지면서 한일병탄 이전에 매입한 일본인의 토지소유권도 인정되는 등 배타적 소유권이 강화되었다. 반면 근대적 토지소유권 확립이라는 명목하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조선 농민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소작농들이 가지고 있던 영구경작권이 폐지되면서 소작농의 권익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사라지게 되어 소작농들의 경제적 불안이 가속되었다. 그리고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총독부의 지제(地稅) 수입을 증가시켰고, 이 재원을 활용한 식민지배가 일제의 입장에서는 수월해졌다.
둘째. 일제는 자국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 산미증식계획이라는 이름하에 쌀을 수탈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밭을 논으로, 수리조합을 설립하여 저수지 만들기, 수리시설 확충하여 수리조합비 징수, 고율의 소작료(80%) 징수 등 밀양의 농민들은 열악한 조건 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셋째, 역사적으로 나라의 위기 때마다 분연히 일어선 충의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이고 특히, 의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을 비롯하여 사명당 유정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점도 일제에 저항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사림의 종정이라 할 수 있는 점필재 김종직의 학풍을 이어온 지역의 유림과 대한제국 연간에 세워진 근대학교의 교육적 영향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집성학교, 개창학교, 화산의숙, 동화학교, 고명학교 등.
다섯째, 기독교와 불교, 대종교 등 종교적인 영향력을 빼놓을 수 없다. 교회는 춘화교회, 마산교회(무지개전원교회), 다원교회, 예림교회, 무릉교회, 무안교회, 희곡교회, 밀양교회 등이 있고, 불교계에는 표충사(단장면 용회동 만세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배부하였으며, 대종교는(단애 윤세복 선생, 윤세용 등) 환인현에 동창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민족혼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2. 밀양의 만세운동
밀양에서는 8번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첫째, 3.13밀양만세운동(1919년 3월 13일-음력 2월 12일, 밀양장날) 밀양면과 부북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아북산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배포하였다.(윤세주 주도 윤치형, 이장수, 최수봉, 김병환, 정동찬, 권재호, 설인길, 정동준, 윤보은, 박소종, 최종관, 김소지, 김상이, 박작지, 엄청득, 노재석, 윤방우, 양쾌술 등 )
둘째,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3월 14일)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명이 참여한 만세운동
셋째, 밀양면 유림의 만세운동(3월 15일) 밀양 유림구락부(유림회)에서 밀양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긴급 모임을 갖고 밀양천변 솔밭광장에서 시회(詩會)를 열었으며, 이에 기독교인 수백명이 태극기를 들고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넷째, 안희원 장례 만세운동(3월 20일) 밀양의 덕망 인사인 안희원의 장례행렬이 밀양 시장을 지날 때 상여소리가 만세소리로 변하여 시위를 하였다.
다섯째, 밀양소년단 만세운동(4월 2일) 밀양소년단은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생 , 졸업생 등으로 조직된 비밀학생 단체로 보이며, 이들은 시위 전날 아동산에 모여 만세운동을 결의하여 다음날 만세운동을 하였다.
여섯째, 단장면 만세운동(용회동 장터 만세운동,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에서 열리는 장날을 시위일로 정하였는데 이날은 사명당 유정대사의 춘향일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지역 독립운동가는 물론 표충사 승려들은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민간복을 입고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헌병과경찰이 해산을 강요하자 헌병주재소를 포위하여 돌을 던져 주재소를 완전히 부수었다. 이날 시위로 364명이 검거되고 71명이 송치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징역과 태 등의 형을 받았다.
일곱째, 부북면 만세운동(4월 6일) 일명 춘화리 만세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시위는 춘화리, 덕곡리, 청운리 주민들에 의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평양에서 이주해온 김씨들이 일촌을 이루어 살고 있던 기독교 장로회 신자들이 이곳에 사립계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또 이곳에 춘화교회를 설립하였다. 계성학교 교장인 김래봉이 평양에 갔다 그곳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돌아와 학생들과 태극기를 만들었다. 만세 당일 5~6백명이 모인 가운데 김성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하였으나 일본 순사들이 겁이나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여덟째, 청도면 인산리 만세운동(4월 10일) 청도면 인산리 광장에 모인 50여명이 나팔을 불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광산업을 하면서 모여 사는 일본인촌으로 몰려가 “너희들을 물러가라.”라고 외치자 일본인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있었다고 한다. 한 밤중에 일어난 터라 경찰의 출동은 없었다고 한다.
3. 밀양독립운동의 특징 및 역사적 의의
첫째, 밀양의 민족운동은 지역 주민 대다수의 참여로 민중적 토대 위에서 시기별로 다양한 형태로 풍부하게 진행 되었다.(8차례의 만세운동, 의열단 투쟁, 청년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국민권익옹호운동, 종교운동, 민족교육운동, 신간회, 근우회 등)
둘째, 계층과 부문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혼란과 분열된 모습이 아닌 연합과 국내외의 유기적 연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점이다.(유림 만세운동에 기독교 태극기 만들기, 의열단 활동과 조선의용대의 활동 등)
셋째, 밀양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운동이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전개된 점이다.(보수와 개화의 갈등이 없었고, 계층, 종교, 연령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