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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의사 순국 제99주기 추모제를 다녀와서

산동1 2020. 7. 9. 10:28

밀양경찰서 폭탄 의거 100주년과 최수봉

78일은 최수봉 의사(義士)의 순국일이다. 최수봉은 189433일 마산리 792번지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적 이름은 경학(敬鶴)으로, 1905년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김원봉과 학교를 함께 다니며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키웠다. 그런 중에 우리의 조상인 단군이 일본인들의 후예라는 일본인 교사에게 항변하다 퇴학을 당했다. 이후 동화학교에서 전홍표, 김대지 등으로부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배웠다. 나라 잃은 현실에 실망하던 중에 의열단에 가입했고, 의열단 1차 국내폭파 의거로 피신 중이던 김상윤과 이종암으로부터 밀양경찰서 폭파를 제의받고는 흔쾌히 수락했다. 최수봉은 고인덕이 만들어준 폭탄을 마을 뒷산에 숨겨 두었다가 19201227일 밀양경찰서장이 서원에게 훈시하는 틈에 사무실 안으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도순사부장의 오른팔에 맞아 가볍게 굴러 불발이 됐다. 다시 현관 앞에 폭탄을 던졌으나 이는 자살용으로 위력이 약해 서류함만 조금 파손시켰다. 달아나던 최수봉은 잡히지 않으려고 칼로 목을 그어 자결을 시도했으나 절명(絶命) 직전 잡혔다. 일본 경찰은 인근 병원에서 응급처치하고는 부산의 도립병원에 입원·치료하게 한 후 심문을 했다. 최수봉은 관련된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허위진술로 수사에 혼선을 줬다. 1심에서 무기 징역형을 선고했으나 검사가 이에 불복, 상소(上訴)하여 대구 감옥으로 이송됐다. 1921416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최수봉은 아무런 동요 없이 태연했다. 이후 고등 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됐다. 별다른 피해가 없는데도사형을 선고한 것은, 3개월 전 세상을 놀라게 한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의거(1920914)에 이은 최수봉 의거로 의열단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졌으며, 의열단 활동을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판결이었다. 192178일 오후 3시 교수대에 선 최수봉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는 당당하게 순국했다. 밀양의 청년회원들은 전홍표선생과 의논하여 시신을 열차로 옮겨와 장례식을 치렀다. 그 과정에서 기부금 모금이나 운구(運柩)한회원 30명이 기소됐다. 최수봉의 의거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멀리는 사명대사의 충의 정신에다 가까이는 전홍표, 김대지, 황상규 등의 가르침과 밀양청년들이 주도한 의열단의 투쟁과 함께했다. 이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과 상해 황포탄 의거(1922), 종로경찰서 투탄(1923) 등으로 의열투쟁의 맥()을 잇게 했다. 가난하게 태어나 배우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꿈꾸었던 순수청년 최수봉, 그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삼랑진(숭진리)에 사는 처녀 김문기였다. 그녀는 최수봉의 순국 소식에 식음(食飮)을끊고 2주 뒤인 722일에 순절했다. 두 사람은 영혼결혼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63815일 정부는 최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했다. 1969년에는 마을 뒷산에 묻힌 최 의사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으로 이장했다. 2002년에는 성균관유도회(상남지회)에서 <최수봉 의사 추모기적비>를 세우고는 매년 순국일에 밀양 향토청년회와 함께 추모제를 지내오고 있다. 2016년 국가보훈처는 12월의 립운동가로 최 의사를 선정했다. 밀양은 독립운동서훈자가 81명으로 진정한 독립·의열의 고장이다. 우리는 그들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해 전에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선생의 생가지 주변 도로를 그들의 )로명명(命名)했다. 약산로, 석정로, 백민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