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님!, 석정 윤세주는 1901년 밀양에서 태어나 1919년 밀양 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의열단에 가입해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 중 한 곳의 파괴를 목표로 거사를 준비하다가 1920년 체포되어 7년 옥살이를 하였다. 밀양청년회, 신간회 밀양지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하비방 15호에서 조선인 계몽방송을 하였으며,중국 난징으로 가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그곳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에는 조선의용대에서 활약중 한단시 태항산 장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당시 나이 42, 조국의 해방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머나먼 타국 산골짜기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면서 고귀한 목숨 마져 기꺼이 바쳤던 열사의 애국심을 생각하면서 석정 윤세주 열사 기념사업회의 주관으로 님의 발자취를 찾는 역사탐방을 함께 떠나기로 했다.

  몇 번의 사전 모임을 갖고 석정 윤세주 열사의 독립운동을 공부하고 고등학생 8명과 교사 11명 관계자 몇분과 함께 201314일 아침 조선독립군의 발자취를 찾아 비행기에 몸을 싣고 중국으로 향했다. 상해에 도착하자 중국의 유학생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여행의 첫날을 맞았다.

첫째 날,

  먼저 우리는 상해 임시정부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은 몇 해전 딸과 함께 와본 곳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중국 안내자가 미숙하나마 한국어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열의에 찬 학생들의 눈빛은 빛났으며 촬영을 만류하지만 곳곳에서 몰래 몰래 사진을 찍곤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았으며 과연 여기에서 조직의 활동들이 이루어 졌겠는가?”라는 의구심이 들정도로 실내가 좁았다.

  다음 여정으로는 인근에 있는 하비방 15호이다.

하비방 15호는 당시 건물 2층에서 윤세주, 최석훈, 배천택 등 열사들이 민족계몽운동 방송을 하던 곳이다. 지금은 주민들이 살고 있어 그 건물만 보고 돌아서야했다. 당시에 상해는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나라를 잃은 많은 나라들의 독립열사들이 독립운동을 하던 도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상해가 중국에서도 치외법권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비방 15호를 탐방하고 우리는 홍구 공원으로 갔다.

  홍구 공원은 윤봉길 의사께서 도시락 폭탄 투척으로 유명한 곳이다.

폭탄 투척으로 상해 총사령과 시리카와 외 많은 일본의 거물급 인사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당시 중국 장개석 국민당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한명이 했다.” 정말 대단하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홍구 공원입구에서 한참을 걸어가니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지에 도착했는데 동행한 풍객께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장소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노신 무덤이 있는 곳이 폭탄 투척 장소 일 것이라고 하면서서 그 쪽으로 안내했다. 당시에 2만명의 관중이 모였다고 생각하면 이 곳이 정말 맞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 나오면서 매헌 이라는 누각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기념관으로 관련 사진 자료들을 모아서 전시하는 누각이었다. 뒷면에는 여기에서 생긴 이익금은 모두 매헌 윤봉길 의사의 기념사업 자금으로 쓰인다고 한글로 쓰인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 마무리 하고 호텔에서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둘쨋 날,

  아침 일찍 짐을 꾸려 절강성 가흥으로 출발했다. 출발하고 얼마지 않아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상해에는 눈이 잘 오지 않는다는데 계속 눈이 내렸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고속도로가 통제되어 더 이상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국도로 진입했다. 여기서부터 버스 기사는 햇갈리기 시작했다. 중국은 워낙 넓은 곳이라 네비게이션도 잘 인식하지 못하고 해서 한참을 돌고 돌아 예상보다 상당히 늦은 시간에 가흥에 도착했다.

  가흥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서 쫓기어 간 곳이다. 여기의 주민 주보성이 백범 김구 선생님의 도피 생활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본인들의 신변 안전마져 위태로운데 우리 독립군을 숨겨 주었다고하니 당시 중국인들은 우리 독립군들을 상당히 신뢰 했던가 본다. 가옥의 내부 구조를 살며보면서 복잡하기도 하지만 군데군데 일본 경찰의 움직임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당시 중국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또 가옥의 뒤편에는 큰 연못이 있어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는 퇴로 확보인지 아니면,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푼 배려인지는 몰라도 조그만 배가 함께 떠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배려하고 생각해야할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당시 가흥은 매화꽃이 유명하여 이 거리를 매만가라고 했고 한다.

  점심을 먹고 약 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남경에 도착했다. 사방은 어두운데 가이드는 천령사를 찾아 이리저리 헤메고 있었다. 몇 번을 돌고 돌아 드디어 천령사에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캄캄한 산길을 약 10분 정도 오르니, 어둠속에서 허름한 건물이 보였다. 여기가 약산 김원봉선생께서 조선정치혁명간부학교를 세워 독립의 꿈을 키우던 곳이다. 당시 윤세주 열사께서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으로 근무했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절간으로 바뀌어 있지만 당시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리면서 훈련하고 공부했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는 향을 피우고 당시에 활동했던 선열들의 고마움을 생각하면서 묵념을 올렸다. 어둠속에서도 당시의 무물, 빨래터를 돌아보고 다시 그길로 내려왔다.

셋쨋 날,

  일정을 조금 앞당겨서 아침 일찍 우리는 남경대학살박물관에 입장했다. 입구에서부터 조각들이 인상 깊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6주 동안 삼십만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12초마다 흐르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고 한명의 사진이 사라질 때 참을 가슴이 아프다. 어째서,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던가?

무질서 하게 늘어져 있는 수많은 유골들과 학살 장면을 담은 수많은 사진, 위안부들의 생활 사진 및 일본군의 장비를 보면서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여기에서 중국인들은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잊지는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만 명이 넘는 학살유골을 그대로 발굴하여 그 자리에 이 박물관을 지었다고 하니 중국인들의 생각도 대단하다고 한다. 관람을 마지막으로 하면서 그 때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로하는 묵념을 하면서 박물관의 일정을 마쳤다.

  박물관의 관람으로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면서 남경대학으로 향했다. 남경대학은 조선의용대가 남경을 떠나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남경대학을 뒤로하고 우리는 명효능을 방문하였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몇 명의 사람들만 효능으로 향했다. 능이라고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산자락의 뒷동산 전체가 능인 것이다. 잘 정비된 가로수와 수호신 석상들을 보면서 우리는 또 다시 버스에 올라 수 없이 달리고 달려서 무한으로 달렸다.

넷째 날,

  무한에서 조선의용대 창립지를 가면서 황학루를 거쳐 지나갔다. 강 기슭에 있는 황학루의 규모는 우리가 알고 있는 누각의 규모보다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마천루와 같았다. 황학루(黃鶴樓)호북성 무한(武漢)의 장강(長江) 가에 있는 누각인데 이 누각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 신씨(辛氏)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술을 팔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찾아와서 술을 달라고 했다. 신씨는 감히 거절을 못하고 큰 술잔에 한 잔 부어 주었다. 신씨는 반 년 동안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이렇게 했다. 하루는 사나이가 술값을 갚는다며 귤 껍질을 집어서 벽에다 노랗게 학을 한 마리 그렸더니 손님들이 보고 좋아라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학이 노래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돈을 내고 이것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서 신씨는 금방 부자가 되었다. 10년 뒤 그 동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던 사나이가 돌아와 피리를 불자 벽에 그려져 있던 학이 사나이 앞으로 날아왔고 사나이는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신씨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누각을 세우고 황학루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참을 지나 우리는 조선의용대 창립지, 조선의용대 창립기념 축하행사가 열렸다는 건물, 약산 거주지를 돌아보면서 이곳 무한은 신해혁명의 발상지이면서 미래 중국의 새로운 수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도시라고 풍객 김영민 사장님께서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무한역으로 와서 이선생식당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지난해 말에 개통을 한 시속 300이상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한단으로 출발했다. 원래는 무한에서 침대 열차를 타고 8시간 이상을 달려야 한단에 갈 수 있었는데, 며칠 전에 새로운 기차가 개통되어 3시간 만에 한단역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여기에서는 중국의 공무원이면서 조선의용대에 관심이 많은 왕춘향 여사를 만났다. 왕춘향 여사는 한족이면서 평양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중국에 왔기 때문에 우리말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며칠 동안 버스에 시달리고 음식이 맞지 않아서인지 몸이 서서히 무거워지면서 집이 그리워진다. 전화기 너머로 아내와의 대화를 끝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다섯째 날,

  조식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또 짐을 꾸려 작은 버스에 3대에 나누어 탔다. 오늘은 중국에서도 상당히 높은 관직에 근무하고 계시는 상영생 관장님을 만나 함께 일정을 시작했다. 상영생 관장님은 조선의용대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 이곳을 방문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안내해 주시는 분이시다.

  먼저 태항산의 장자령으로 향했다.

태항산, 태항산은 길이가 600가 넘는 하나의 산맥이다. 태항산의 깊고 깊은 골짜기에 있는 장자령은 윤세주 열사님께서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후퇴하는 중국팔로군의 퇴로를 열기 위해서 조선의용대가 용감히 싸워 퇴로를 열어주서 훗날 중국의 지도자가 된 많은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살 수 있었던 전투가 바로 장자령 전투이다. 시골길을 굽이굽이 돌아 산골로 접어 들기를 몇 시간 이제는 아스팔트길이 아니라 시멘트 포장길이었다. 우리나라 산골의 길처럼 차선도 없고 좌우에는 산만 보이는 깊은 골짜기로 향했다. 급경사를 몇 번 돌아 제법 큰 저수지 아래에서 차는 더 이상 오르지를 못했다. 몇 번 후진 전진하여 우리 버스는 겨우 올라갔지만 세 번째 버스는 더 이상 오르지를 못하고 사람들이 내려서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서 장자령까지는 한참을 더 울라야 한다고 한다. 길이 눈이 얼어서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더 이상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넓은 공터를 찾아서 장자령을 향해 제물을 차리고 님의 혼을 달래기 위해 노제를 오렸다. 탐방중 첫 제사이기에 더욱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루어졌다. 탐방대원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내리막 빙판길까지는 걸어서 다시 버스를 타고 상무촌으로 향했다.

  상무촌은 조선의용대가 화북지역으로 온 후 처음으로 주둔한 곳이다. 상무촌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의용대태항산지구항일전순국선렬전적비가 우리 일행을 맞아주고 있었다. 전적비 뒤편에는 시골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보아도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참배와 설명을 듣고 무명용사의 무덤을 찾아 올라갔다.

  무명용사의 무덤은 일전 TV에서 이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한식이면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준다고 방영되었던 곳이다. 마을 뒤편 밭을 조금 지나자 義勇軍烈士之墓(의용군열사지묘)”라고 적힌 비석과 함께 돌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중국식 무덤이 있었다. 준비한 제물로 제사를 지내고 이 무덤에 대하여 또 윤영민 사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당시에는 또 한분의 무덤이 있었는데 가족이 와서 찾아가고 이름 없는 한분의 묘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설명을 듣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실장님의 덧붙인 설명을 들으면서 이 태항산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리 선조들이 돌아가셨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마을로 내려와서 마을 촌로께서 당시의 조선의용대를 지켜보았던 때를 회고하면서 우리들에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조선의용대는 당시 홍복사에 머물면서 항상 밝은 표정으로 아리랑을 자주 부르고, 연극을 통해서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당시에 홍복사는 한글로 일본군을 투항을 유인하는 문구가 많아서 일본군이 지울 수 없어서 건물은 불태우고 담장은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설명을 아끼지 않으신 할아버지께 장갑과 목을 따뜻하게 하는 넥웜을 선물하였다. 지금의 홍복사는 이후에 지은 건물로 건물 한 채만 남아 있었다. 상무촌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한단시에서 우리들의 탐방에 어려움이 없도록 돕기 위해서 세분의 관계자께서 승용차로 우리들을 안내하셨다. 버스 앞에서 비상등을 켜고 차량안내를 해주어서 목적지를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마전에 도착해서 당시 팔로군사령부가 있었던 곳을 방문했다. 마오쩌뚱의 집무실 등 당시 사령부가 사용했던 물건, 전화기, 석유등불, 농기구 등을 관람하고 다음 주둔지인 운두저촌을 향했다.

  운두저촌은 조선의용대가 머물렀던 곳으로 아직까지도 일본군 투항을 위해 한글로 써놓은 문구가 있는 곳이다. 마을입구에 도착하자, 우뚝 서 있는 순국선열전적비가 보이고, 마을입구에서 마을 아주머니께서 연자방아를 돌리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옥수수를 연자방아에 넣고, 방아를 돌리면서 저녁거리를 준비하고 계시는 듯했다. 난생처음으로 연자방아를 돌리는 모습을 보니 신기해서 사진을 몇장 찍었다. 마을의 남쪽을 지키는 문격인 모습인데, 이 벽면에는 페인트로 왜놈의 상관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대를 찾아 오시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라는 문구를 볼 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였다.

오랜만에 한글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에 우리말을 마음대로 쓰지 못했기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또 이 문구를 보면서 박한용실장님께서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당시 일본군에는 많은 우리의 조선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한글을 읽고 투항하길 바라는 선전문구였던 것이다. 우리의 형제들이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이 전투에 참여했겠는가? 어쩌면 가족의 안전을 위하여 한 몸 희생하기 위하여 일본군에 입대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국민끼리 남의 나라에서 총부리를 겨누어야하는 이런 비극이 ...... 80년간 건물을 지키고 또 이 문구를 계속 지켜주신 마을 사람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마을 촌장께서 나와서 몇 해 전에 찍었던 사진을 들고 나와서 자랑스럽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사진에는 지금 보다 더 많은 한글이 적혀 있었다. 마을을 돌아서 나오면서 양지바른 곳에 모여 소담을 즐기시는 마을 촌로들을 보면서 우리는 석문촌으로 향했다.

  석문촌은 석정 윤세주 열사의 초장지(처음 장사지낸 장소)로서 아직도 무덤이 있는 곳이다.

먼저 올라가면서 좌권장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열사님의 초장지로 올라갔다. 왼쪽은 진광하 열사, 오른쪽은 윤세주 열사님의 중국식 무덤을 꾸며 놓으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세주 열사님께 제를 올리고 지금까지 연습한 최후의 결전군가를 씩씩하게 부르면서 열사님의 애국심을 생각해보았다. 독립 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또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애타게 바라면서 멀고먼 이국 땅에서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목이 메였다. 나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오면서 기념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마지막에 한분이 설명하시는데 밀양(윤세주의 고향)의 흙과 평양(진광하의 고향)의 흙을 같이 모아서 보관하기로 하였는데 아직 평양의 흙이 오지 않아서 밀양의 흙만 보관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열사님들의 바램도 아마 하나된 조국일 것이라 생각하니 하루 빨리 남북이 통일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탐방한 곳은 중원촌으로 조선의용대가 운두저촌 다음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건물로 지금은 절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편에는 조선의용대의 당시 사용 물건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다른 건물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절이라고해서 우리나라처럼 화려한 장식은 없고 아주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허름한 건물에 낡은 부처와 싹아서 곧 깨어질 듯한 향로가 전부였다.

   1월의 해는 아직 짧았다. 어둠이 벌써 깔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남장촌으로 갔다. 조선의용대가 마지막으로 머물렀으며, 정율성 장군께서 군정학교교장으로 계셨던 곳이다. 정율성은 광주에서 태어나 난징으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과 조선해방행진곡을 작곡하신 분으로 해방후 북한에서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주은래의 요청으로 다시 중국으로 가서 음악공부에 전염하였다. 유해는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아내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여기에 있는 건물은 아직도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어 현재 유치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또 당시에 연극을 하였던 무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건물들이 지금 보았던 어느 것 보다 크고 짜임새가 깨끗하게 보존된 것을 보면서 우리 나라였다면 이런 건물들을 남겨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의 잔재다 뭐다 하면서 불태우고 철거하고 버리지 않았던가?

  오늘은 장자령 입구에서부터 조선의용대가 머물렀던 상무촌, 마전, 운두저촌, 성문촌, 중원촌, 마지막으로 남장촌까지 탐방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남의 나라에서 추위와 싸우고, 배고픔을 참으면서 일본군과 싸워야했던 열사님들을 생각하니 우리는 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으면서 일정을 마무리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여섯째 날,

여명이 밝아 오기도 전에 서둘러 식사를 하고 진기로예 열사 능원에 갔다. 이 능원은 좌권 장군을 비롯하여 중국 공산당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던 사람들을 모셔놓은 공원이다. 우리는 먼저 윤세주 열사 묘를 찾아서 제를 올렸다. 최필숙 선생님의 축문을 시작해서 학생대표, 교사대표께서 술잔을 올렸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나아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갈이로 나가자 나아가 굳게 뭉치어 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결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지들아 승리의 깃발은 우리 앞에 날린다 다앞으로 동지들아.” “최후의 결전군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열사님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눈시울은 뜨겁지만, 목소리만큼은 씩씩하게 불렀다. 돌아서 나오는 길에 진광하 열사의 묘를 참배하고 나오면서 여기에서 제일 크게 만들어진 좌권장군의 무덤도 보면서 능원의 탐방을 마치고 또 다시 석가장으로 출발했다.

   석가장은 당시 일본군 형무소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빈민촌처럼 일반인들의 주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여기도 어느 곳과 다름없이 무질서하게 늘어선 전깃줄과 한 번도 닦지 않은 대문간의 모습은 현재 중국인들의 뒷모습을 보는 듯하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때에는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당하면서 가라져갔을까를 생까하니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다시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까지는 약 네 시간을 달려야 한다.

  창밖에는 끝없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고, 가끔 양떼를 몰고 다니는 아저씨만 모습만 보인다. 몇 시간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평원에는 밀이 심겨져 있었다. 마을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이 넓은 땅에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는지 궁금하다. 휴게소 여러 가지 견과류를 팔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마름 종류인데 그 크기는 우리나라 마름의 다섯배 정도로 크고, 모양은 꼭 버팔로의 머리 같았다. 무슨 맛일까? 궁금하여 한 봉지 사와서 먹었다. 맛이 우리나라의 마름과 똑 같았다. 버스에서의 긴 시간이 무료하지 않도록 박한용 실장님의 중간중간 중국 옛날 이야기에서부터 오늘날의 중국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으면서 지겹지 않게 북경에 도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조조의 아들 조식의 칠보시가 생각이 난다.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콩을 삶는데 콩대를 베어 때니

豆在釜中泣(두재부중업솥 안에 있는 콩이 눈물을 흘리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相煎何太急(상전가태급) 어찌 그리도 세차게 삶아대는가.

형이 동생을 죽이려다가 눈물만 흘리고 동생을 멀리 보냈다고 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한국 음식이다, 갈비에 김치......

한국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만찬을 즐기면서 우리들을 맞이한 사람들이 있었다. 상고사의 대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며느님께서 참석하셨고, 정율성 장군님의 따님이 70이 넘으셨는데도 조선의용대 탐방대원을 맞이하려 여기까지 나오셨다. 연로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오셔서 맞이해주시니 몸둘바를 몰랐다. 또 세동() 관계자분께서도 나오셨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세동에서 오신 분은 밀양고등학교 한해 후배였다. 타국에서 학교 후배를 만나니 더욱 반갑고 기뻤다. 중국주재 한국문화원에 근무하시는 분이 오셨는데 그분 또한 밀양 출신이었다. 고향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피곤한 몸을 씻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일곱째 날,

  오늘 일정은 북경대를 방문하고 만리장성에 갔다가 공항으로 가는 날이다. 그런데 일정을 바꾸어 팔보산 공묘와 이육사, 이원대 열사의 순국 감옥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일정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먼저 북경대학에을 방문하고 하였다. 북경대 여기저기를 보고 북경대 도서관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일행은 북경대 건너편 호텔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중국 유학생들의 이야기와 참가한 고등학생들의 일정을 마치면서 소감을 발표로 간담회를 마쳤다. 다시 버스를 타고 팔보산 공표를 탐방했다. 팔보산공묘는 우리나라의 국립묘지처럼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운사람의 국립공원묘지인 샘이다.

여기에는 작곡가 정율성, 정설송 부부가 합장되어 있는 묘이다. 참배를 마치고, 자금성, 천안문 광장을 스쳐 지나갔다. 버스를 타고 왕부정 거리로 가면서 이육사 열사님께서는 집안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 조국에 들었다가 집에서 체포되었으며, 당시 열사님께서 독립운동가의 명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많은 희생자를 낼뻔하였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열사님 본인만 체포되셨다고 박한용 실장님께서 체포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드디어 이육사, 이원대 열사께서 순국하신 감옥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당시의 완벽한 건물들은 없지만 여기에서 열사님들께서 순국을 하셨다니 또 다시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육사, 민족저항시인으로 유명한 경북 안동 출신의 애국 열사! 이 건물 저 건물에서 독립투사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하셨을까? 왜놈의 시퍼른 칼날과 모진 고문에서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무서워하지 않았을 조상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67일간의 빡빡한 일정에도 한번도 투정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주고 자금성이나 만리장성 관광보다는 팔보산공묘와 이육사, 이원열 열사의 순국감옥을 탐방 택해준 8명의 고등학생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일정 내내 사건의 내용과 배경을 상세히 설명해주신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실장님, 풍객 김영민 사장님 밀양에서부터 제사음식 준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신 최필숙선생님, 공부할 시간도 부족할텐데 끝까지 안내와 통역에 도움을 준 유학생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이 행사를 주관하고 끝까지 책임져 주신 세동() 이철환 과장님 그리고 함께하신 선생님들 정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비록 반쪽인 대한민국이 이렇게 자유롭고 평화롭게 잘 살며,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 내의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67일 동안 탐방하였던 곳에서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나, 조선의용대, 독립군 등 각계각층의 독립 운동가들이 피와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이념 분쟁으로 한쪽이 완전히 덮여진 반쪽 교육을 받아서인지는 근현대사를 등한시한 시대의 교육 피해자인지 아니면 본인의 무지로 인해서 솔직히 이전에는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열사에 대해서 솔직히 잘 몰랐다. 몇 해 전부터 연극으로 인해서 내 고장 출신 애국 열사들이 홍보 되어 밀양시민들이 조금씩 알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평가는 이념의 잣대가 아닌 독립운동 그 자체로 남북이 동시에 재조명 되어야 할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이번 행사를 통해서 조선의용대의 활약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순국선열님들께서 정말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활약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조선의용대의 기둥이요 설립자였던 약산, 그리고 조선의용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석정 열사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되어 무엇보다 기뻤다. 이분들은 우리 고장에서 태어나 조국을 위해 사셨고 목숨마져 기꺼이 바쳤던 분이기에 우리 밀양인들의 가슴속에는 영원히 으로 남을 것이다.

Posted by 산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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