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수의 고향은 창녕이다. <고려사> 조민수 열전에 따르면, 그는 고려 공민왕 때 순주부사(순천시장)로서 홍건적 격퇴에 기여하면서부터 중앙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홍건적은 세계 최강인 몽골에 저항하는 중국인 반체제 집단이었다. 붉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이들은 14세기판 알카에다 혹은 IS(이슬람국가)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을 격퇴하는 공로를 세운 걸 계기로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의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공민왕의 후계자인 우왕 때, 조민수는 신흥 최강국 명나라에 맞서 요동(만주) 땅을 정벌하라는 왕명을 받고 이성계와 함께 5만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그랬다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유턴'해서 우왕 정권을 전복하는 1388년 위화도회군을 성사시켰다. 이 회군은 고려왕조에 치명타를 가함으로써 4년 뒤 조선 왕조가 수립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역사의 분기점이 됐던 것이다

위화도회군 직전까지 조민수는 보수파였다. 이 당시 우왕 정권의 핵심 실세는 최영 장군이었다. 최영은 정권의 공동 경영자였다. 조민수는 그런 최영의 신임을 받았다. 최영은 요동정벌군 서열 1위인 팔도도통사였다. 하지만 직접 출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벌군의 현장 책임자는 이성계였다. 하지만 최영은 이성계를 불안해했다이유는 많았다. 이성계는 여진족 구역인 함경도 쪽의 동북면에서 독자 세력을 갖고 있었다. 또 진보세력인 신진사대부들과도 친했다. 이 시대의 사대부들은 지방 출신의 중소 규모 부동산 소유자로서 개혁 성향을 보이고 중앙정계에 진출했다는 의미에서 신진사대부로 불렸다. 이성계는 이들과 친했다.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최영은 임금 경호부대 같은 정부군 내에서 잔뼈가 굵었다. 평생을 오로지 임금만 바라보며, 독자세력 구축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양심적인 보수파였지만, 신진사대부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최영 열전에 따르면, 요동정벌군 출정 얼마 전에는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숙청하려고까지 했었다그런 최영이 볼 때 이성계는 위험인물이었다. 독자세력을 기반으로 진보세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있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릴 만했다. 이런 이유로, 요동정벌군 출정 당시, 최영은 이성계와 손은 잡았지만 마음까지는 주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라도 정벌군 5만이 이성계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자 이성계를 정벌군 서열 3위인 우군도통사에 임명했다. 서열 2위인 좌군도통사 자리에는 믿을 만한 조민수를 배치했다. 그렇게 해서 조민수를 형식적으로나마 정벌군의 현장 책임자로 만들었다진보세력과 연결된 이성계를 견제하고자 조민수를 좌군도통사에 임명한 데서 드러나듯이, 조민수는 보수세력 내에서 비중있는 인물이었다. 지도자급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조민수는 결정적 순간에 보수 정권을 배반했다. 이성계의 쿠데타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현장에서 이성계와 함께 정벌군을 움직이던 조민수가 회군에 찬동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쿠데타를 단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단행했더라도 성공 가능성이 낮았을 것이다.

조민수는 보수정권과의 인연을 과감히 내던지고, 이성계와 함께 우왕과 최영을 축출하고 창왕을 옹립한 뒤 개혁정권을 구축했다. 이색·정도전·정몽주 같은 신진사대부가 대거 동참하는 정권에 조민수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다하지만 조민수의 새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상황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신진사대부가 주도하는 개혁운동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토지개혁이 비위에 거슬렸다. 그래서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저지 투쟁에 나섰다. 조민수 열전은 "(그가) 사전(私田)을 혁신하려는 논의를 저지했다"라고 기록했다. 사전(私田)은 개인이 소작료 등을 거둘 수 있는 토지로서, 귀족 지주들한테는 치부의 도구였다농업경제 시대의 토지개혁은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 소유권 및 기업 경영권의 혁신이었다. 지주가 농민들을 동원해 농업을 경영하는 모습은 지금의 기업 경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농지개혁은 부동산 소유권뿐 아니라 기업 경영권과도 연결되는 문제였다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 중 하나는 부동산 소유 및 기업 경영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하는 점이다. 다수 대중의 편을 드느냐 소수 특권층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진보·보수가 나뉜다토지 문제가 불거지자 조민수는 본색을 드러냈다. 진보세력과 합세해 보수정권을 무너뜨린 그가 보수적 입장으로 회귀했다. 보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389년이다. 진보세력에 동조한 이듬해에 원래 입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김무성이 복당하는 데 들어간 시간과, 조민수가 회귀하는 데 들어간 시간 역시 비슷했다.

조민수 역시 '정치 철새'로만 해석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보수세력 지도자였던 그는 고려 역사의 전환점에서 진보세력과 손잡고 보수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얼마 안 있어 보수적 입장으로 도로 돌아갔다. 위화도회군 이후로 단죄의 대상이 된 보수세력 입장으로 회귀한 것이다. 단순한 철새가 아니라 역사의 죄인이 될 만했던 것이다조민수 역시, 연어도 아니면서 역사의 물결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 역시 자기 시대의 역사적 의미에 둔감했거나 아니면 '정치적 생계'가 너무 다급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역사 발전에 대해 너무나도 무성의한 사람이었다.

토지개혁 문제를 계기로 보수적 입장으로 되돌아간 조민수는 얼마 안 있어 신진사대부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신진사대부들은 그에 대한 탄핵을 추진했다. 이 탄핵은 성공했다. 1389, 조민수는 고향 창녕으로 유배됐다. 유배 뒤 특사됐지만, 진보세력과 다시 맞붙었다가 1390년에 창녕으로 다시 유배됐다. 그리고 여기서 생을 마쳤다. 고려 멸망 2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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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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