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비(한비)

여행 2014. 8. 11. 20:25

<표충비>

표충비는 일명 땀나는 비라고도 하여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 변란의 징후가 있을 때 비면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마치 구슬땀 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염려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고 하여 신성히 하고 있다. 때로는 비석의 4면에서 여름날 농부의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처럼 맺혀 며칠씩 계속해서 많은 양이 흐르기도 하고, 앞면과 옆면 혹은 한면과 두면에서만 잠깐씩 흐르다가 그치기도 하는데, 신기한 것은 글자의 획안이나 머리돌과 좌대에서는 물기가 전혀 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양표충사 ․ 송운대사 영당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이의현 찬(짓다)

가선대부 홍문관 부제학지제교 김진상 서(쓰다)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유척기 전(전두)

아, 우리 선조임금 이십오 년에 왜적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 침입하였다.

선조임금께서는 서도로 몽진하시고 왜놈의 총칼이 팔도에 꽉 차매 안으로 밖으로 국록을 먹는 자가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하니 적이 드디어 마음대로 이 나라를 짓밟았느니라.

이때에 송운대사 유정은 불교를 닦고 있었느니라. 석장(錫杖)을 날리며 고성에 들어가서 적에게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개유하니 적이 송운대사의 위엄이 늠름한 것을 보고 즉시 일어나서 공손하게 절을 하고 그 부하를 훈계하니 이로 말미암아 영동 9군은 흉악무도한 비참한 지경을 면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강개(慷慨)한 어조로 슬퍼하면서 모든 중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고 있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버린 중이라 할지라도 나라 일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 지금 원수 왜적이 침입하여 나라의 운명이 이와 같이 위태하거늘 어찌 앉아서 가만히 보고 구하지 아니할소냐! 내 이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도우고 창생을 구하려 하니 뜻이 있는 자는 나와 함께 일어나라」하고 곧 무리를 모았더니 수백 명이 모집되어 순안으로 달려갔다.

이때에 송운대사의 스승인 휴정은 선조께서 의주로 파천했다는 말을 듣고 의주에 가서 임금께 뵈여 8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있었으나 늙었으므로 사퇴하고 송운대사를 자기의 대로 하니(송운대사는 평양에서 유성룡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 때 서산대사의 대로 도총섭을 맡았다는 사실과는 다르다) 드디어 체찰사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와 협동하여 평양 적을 파하고 도원수 권율을 따라 영남에 내려가 여러 번 적을 참획하였으므로 임금께서 가탄하시고 당상제에 올리고 유총병정을 따르게 하였다.

왜영에 들어가 기요마사를 개유하였는데 세 번 왕복하여 그 요령을 얻은 것이 많다. 기요마사가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물으므로 대답하기를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으니 네 머리가 바로 그것이다」하니 기요마사의 낯빛이 변했다 한다.

돌아오매, 임금이 내달에 불러 정탐한 왜적의 정세를 낱낱이 묻고 곧 전교하기를 「옛적에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는 모두 산인으로서 공훈이 많더니 네가 만일 머리를 기르고 속인이 된다면 백리의 지방과 삼군의 명을 무엇이든지 주겠노라」하니 대사는 감히 당할 수 없다고 사퇴하니 임금께서도 그 뜻을 굽힐 수 없으므로 칭찬하여 갑옷과 무기를 내리어 주고 남은 적을 초격하라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또 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승병을 시켜 농사를 짓게 하여 군량을 저축하는 등 모든 준비를 완전히 하고 인수를 올리고 나이가 많으므로 사퇴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날뛰매 송운대사는 명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마유이독부와 갖은 포악을 해 온 왜적을 평정하였다. 신축년에는 또 부산성을 쌓고 갑진년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니 모든 왜가 서로 돌아보고 놀래며, 두려워하였다. 오직 삼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포로 3천여 명을 쇄환하였다.

임금께 복명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고 가선대부에 올리고 말과 갑옷을 내리어 포장하였다. 이후로 나이 더욱 늙었으므로 사퇴하고 치악산에 들어갔다가 치악산에서 가야산에 들어가 경술년에 입적하였다. 세상에 누린 나이가 67세요, 중된 나이가 57세이다. 장사하는 날 저녁에 사리 한구를 얻어 석종에 간직하여 도파를 세웠다. (57은 55의 착오)

대사는 풍천임씨 문중이며, 아버지 수성이 달성서씨(達城徐氏)를 취하여 가정 갑진년에 대사를 낳았다. 어릴 때 총명이 뛰어나고 점점 자라 글을 읽다가 홀연히 깨닫고 황악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자는 이환(離幻)아라 한다. 재주가 일찍부터 뛰어나니 소재, 사암, 고봉, 제봉 같은 여러 높은 사람들과도 잘 알게 되고 또 시인 최가운, 허미수, 임자순, 이익지 등과는 시리로써 놀게 되는데 시를 주고받고 하는 것이 훌륭하였다.

사명집이 있어서 세상에 간행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가 대사의 한 찌꺼기만 남은 것이요, 정녕 말할 것이 못된다. 오직 그 품기가 호일하고 사리에 달관하는 식견이 있고 지혜에 밝았다. 불교를 쫓았는데 그 교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세상에 나와서 난리를 그치게 할 뜻을 품었으므로 인륜을 떠났으나 나라를 지킬 성심이 돈독하여 적의 세력이 조수와 같이 밀려들어 온 나라가 어지러운 때 명나라 장수들을 맞서되 맞지 못한 것을 한마디의 말로써 뭇 왜를 굴복시키고 한자의 칼로써 뛰어난 공훈을 세우니 공(불교)을 말하고, 환(불)을 말하는 중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임금님께서도 옛날의 영걸에 비교하니 대개 그 포부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니 한 시대의 의부가 되고 한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영남의 밀양 표충사에 대사를 향사하는데 휴정대사는 처음에 난을 감당한 공이요, 영규는 적을 섬멸한 공이 현저하고 또 순절하였으므로 대사와 더불어 향사한다. 숙종조에 명령을 내리어 제수를 관에서 주었고, 지금의 임금께서 또 명하여 복호를 주니 이것은 아름다운 풍속을 후세에 권장하는 까닭이다. 대사는 일찍이 수염을 깎지 아니하고 그 길이가 띠에 까지 닿으니 그 또한 훌륭하였다. 지금 유상이 표충사 영당에 있다. 내가 본래 중에게 문자를 지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글을 지어달라는 청이 오더라도 거절하였으나 오직 대사의 사적은 특히 훌륭하고 뛰어난지라 참아 의리상으로 다른 것과 겉아 물리치지 않고 드디어 다음과 같이 새기어 이르느니라.

사람에게 오륜이 있으니 첫째는 군신이다. 전쟁에 나아가 의를 위해 분기하니 나라는 있고 몸은 없었도다. 이것이 정리요 영교를 따르는 바이로다. 범서를 읽고 바릿대를 가지면 부처이요 사람은 아니로다. 홀로 절만 지키고 불경만 읽고 있는 것이 보통인지라 세상의 위난을 보고 어찌 가슴 속에만 신음할 것인가! 거룩하다 송운은! 행동은 환이요 마음은 진이라 수염이 무릎에 대이니 그 정신이 더욱 빛나도다. 그 본뜻을 생각하니 치건(緇巾)에 만족함이 아니로다. 만경(蛮警 : 임진왜란)이 일어나매 난리를 맑히려고 맹세했다. 군사를 모으고 무리를 뽑으니 군사의 규율이 새로워졌도다. 유점사에서 중생을 구제하니 감화가 왜적에도 미쳤도다. 아홉 고을이 편안하니 사람들을 고루 살린 것이다. 서산이 먼저 하기를 사양하고 임금께 알리더라. 군사 지낸 곳을 생각해 보니 평양과 정진이다. 노획이 곱이나 많으니 비단과 은이 융숭하였도다. 부산 적영을 세 번이나 드나들 때 정성들여 힘 다했다. 보배를 말할 때는 그 말 장했으니 기운이 가을 하늘 덮었도다. 혀로써 칼날을 대로하니 멀리 강한 이웃이 항복하였다. 7년 전쟁에 공이 백성에게 있었으니 임금이 갸륵하게 생각하여 내리신 교서 친절하였도다. 옛날 유병충과 요광효는 공훈을 기린(麒麟)에 비하였다. 너도 능히 뜻을 굽혀 세상을 도우면 박리의 땅과 삼군을 맡기겠다. 스님은 절하고 이마를 숙이고 감히 할 수 없나이다. 신은 늙어 무능하오니 바라건데 인자(仁慈)하심을 드리우소서

산속에 들어가 잔나비와 새와 사귀고저 합니다. 이것이 신의 본 뜻임을 지성으로 아뢰고편안히 돌아와 치악산으로 들어갔도다. 은혜와 상을 거듭주니 표절이 순수하도다. 호광(毫光)이 갑자기 사라지매 법운이 마침내 기울어졌도다. 탑묘는 공중에 솟았고 현주(玄珠)는 진귀함을 보였도다. 응천의 표충사는 천추에 길이 편안할 것이다. 유상이 사당에 있으니 상쾌한 기운이 고요히 서렸도다. 제수를 내리고 부역을 면제하니 은총이 빈번하였도다.

오직 이와 같이 표장하는 것은 대개 제사 받들기를 신칙함이라 이전과 같이 하지 않고 그 가르침이 이에 인함이요 삼대사를 함께 향사하니 서로가 주인이 되게 함이라 공에 보답하고 의렬을 드러냄이 길이 후세에 미치게 하였다. 내가 그 일을 쓰고 정면에 새김은 스님들로 하여금 스승의 의리를 따르게 함이라 공허한 적막속에 빠지지 말고 스승을 따라 환난을 구제할 것이다. 송정후 재임술(영조 18년) 10월에 세우다.

밀양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원문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사(賜) 국일도 대선사 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서산(西山) 청허당(淸虛堂) 휴정대사(休靜大師) 비명(碑銘) - 병서(幷序)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우신(李雨臣)은 비문(碑文)을 짓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윤득화(尹得和)는 글씨를 쓰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 지제교(吏曹參議知製敎) 조명교(曺命敎)는 전액(篆額)을 하다.

지난 만력(萬曆)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섬의 오랑캐들이 도성(都城)을 침범하자 선묘(宣廟)는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그의 제자 유정(惟政) 등을 거느리고 창의(倡義)해 승병(僧兵)을 모집하고 국세(國勢)를 중흥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이에 선조가 그의 공로를 가상하여 여겨 영남(嶺南) 밀양(密陽)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우고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을 함께 배향(配享)하라고 명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의 충의(忠義)에 대해 표창(表彰)하고 장려(?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금상(今上)께서 즉위(卽位)하신 지 14년째인 무오년(영조14, 1738년)에 상신(相臣)의 청으로 인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전답(田畓)을 주어 수호(守護)하도록 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다. 대사의 법통(法統)을 이어 받은 남붕(南鵬)이 밀양의 영축산(靈鷲山) 삼강동(三綱洞)에 사우(祠宇)를 고쳐 새로 짓고는 두 대사가 남겨진 초상(肖像)을 봉안(奉安)한 뒤 그 당호(堂號)를 ‘홍제(弘濟)’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그리고 천 리(里)되는 길을 헤치고 도성으로 달려와 나를 방문하여 글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법조(法祖) 서산 대사의 비문(碑文)은 문충공(文忠公) 월사선생(月沙先生)의 글입니다. 그 뒤 대사의 법파(法派) 4대(代)의 비문은 모두 공의 문중(門中)에서 나와 금강산(金剛山)의 백화암(百和菴) 안에 세워졌습니다. 유불(儒彿)의 교류가 4대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공은 바로 문충공의 적손(嫡孫)으로서, 지금 대사의 사당(祠堂)에 비석을 세워 대사의 공렬(功烈)을 제사하기 위해 공에게 와서 비문을 부탁하는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니, 공이 이 비문을 짓는 일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아! 내가 일찍이 월사 선생의 글을 읽고서 대사가 선문(禪門)에서 걸출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의 문장은 지금까지도 밝게 빛나 사람의 귀와 눈으로 전해져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빛이 나니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대사의 공로에 대해 어찌 내가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남붕(南鵬)의 말을 듣고 가만히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어서 분수에 넘치고 망령된 일임을 헤아리지 않고 붓을 적셔 비문을 지었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며,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라 하고 또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린다. 속세(俗世)의 성씨(姓氏)는 완산최씨(完山崔氏)이고,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외조부(外祖父)는 현윤(縣尹)을 지낸 김우(金禹)이고, 아버지 최세창(崔世昌)은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을 지냈다. 어머니 김씨(金氏)가 기이한 꿈을 꾸고 경진년(중종 15, 1520년) 3월에 대사를 낳았다. 3세였던 사월 초파일 저녁에 어떤 늙은이 하나가 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라.”하고는, 바로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를 않았다. 어려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에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일로써 놀이를 삼았다. 장성하여서는 풍채와 골격이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빼어났고 선법(禪法)을 깨달아 알았다. 영관대사(靈觀大師)에게서 불경(佛經)을 배웠고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30세에 선과(禪科)에 급제(及第)한 뒤에 벼슬이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르렀다. 이윽고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몽사(三夢詞)’를 지어 말하기를,

主人夢說客 주인은 나그네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하고,客夢說主人 나그네는 주인에게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네.今說二夢客 지금 두 꿈 서로 이야기하는 나그네亦是夢中人 이 또한 꿈속의 사람이라네. 라고 하였다.

그리고 향로봉(香爐峯)에 올라가 지은 시(詩)에서 말하기를,

萬國都城如?蟻 만국(萬國)의 도성(都城)은 개미집 같고千家豪傑若醯鷄 천가(千家)의 호걸(豪傑)은 초파리와 같도다.一窓明月淸虛枕 창문 밖 밝은 달은 나의 베개 비추는데無限松風韻不齊 끝없는 솔바람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하네. 라고 하였다.

그 시의 내용을 보면 빛을 감추고 종적(?迹)을 숨진 채 선종에 대해 오묘하게 깨달았음을 익히 알 수가 있다.

기축년(선조 22, 1589년)의 옥사(獄事)에서 요승(妖僧) 무업(無業)의 무고(誣告)로 인하여 투옥(投獄)되었는데,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즉시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가 지은 시를 가져다 보고 손수 그린 묵죽(墨竹)을 하사(下賜)하고는 시를 지어 바칠 것을 명하였다. 대사가 그 자리에서 절구(絶句)를 지어 바치니 선조도 또한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하사하고는 매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이어서 산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참고(參考) 서산대사와 선조임그므이 주고받은 시서산대사(西山大師)瀟湘一枝竹 소상(瀟湘)의 한 대나무 가지, 聖主筆端生 성군의 붓 끝에서 나왔음이로다.山僧香燒處 산승이 향불 사루는 처소에葉葉大秋聲 잎사귀에서 가을의 소리가 들린다.

선조대왕(宣祖大王)葉自毫端出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根非地面生 뿌리도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月來無見影 달이 비쳐도 그림자가 없고風動不聞聲 바람이 불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음이로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 대사는 무장(武裝)을 하고 선조가 피난(避難)을 가 있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선조가 하교하기를, “세상의 난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대가 필요한 힘을 내어 어지러운 세상을 크게 구제하려는 것인가?”라고 하니, 대사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의 말씀에 절을 하고 말하기를, “신(臣)은 승도(僧徒)를 통솔하여 군부(軍府)로 급히 달려가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팔로십육도총섭(八路十六道摠攝)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사문(沙門)을 나누어 유정은 700명의 의승(義僧)을 거느리고 관동(關東)에서 기병(起兵)하게 하였고, 처영(處英)은 1,000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호남(湖南)에서 기병하게 하였으며, 대사는 스스로 문도(門徒)와 모집한 승려 1,500명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모여 명(明) 나라의 군사와 함께 혹은 선봉(先鋒)에 서기도 하고 혹은 후방에서 서기도 하면서 지원하여 위세(威勢)를 떨쳤다. 모란봉(牧丹峯)의 전투에 나가 싸워서 머리를 베어 죽인 왜적(倭賊)들이 아주 많았다. 명나라 군사들이 승기(勝機)를 틈타 왜적을 치니 적들이 마침내 성(城)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였다. 대사는 바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도부도독(都孚都督) 이여송(李如松)이 첩문(帖文)을 보내 칭찬하고 장려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여 충성심이 해를 꿰뚫으니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다.라고 하고, 또 시를 지어 주니 우리나라로 원정(遠征) 온 중국의 장수들이 모두 흠앙(欽仰)하였다.

이에 대사가 청하기를, “신은 늙었으므로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군대의 사무는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부탁하고서 곧바로 예전에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서 본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신(臣)이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시고, 이어서 ‘국일도대선사선교 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갑진년(선조 37, 1604년) 정월, 묘향산(妙香山) 원적암(圓寂庵)에 제자를 모아 놓고 도량(道場)을 둘러본 뒤 설법을 마쳤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影幀)에다가 시를 지어말하기를

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쓰기를 마친 뒤, 초연하게 앉은 채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때의 나이가 85세요, 법랍(法臘)은 65세였다. 그때 기이한 향기가 온 방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대사가 저술한 문집(文集)은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대사의 사람 됨됨이를 보면 얼굴은 훤걸(喧傑)찼으며 지혜는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다. 집에 있었을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입산(入山)해서는 나쁜 짓으로 지은 허물이나 번뇌의 더러움에서 벗어나 깨끗함으로 불법(佛法)을 지켰다. 그리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정성도 타고난 본성(本性)이었다. 무업에게 무고를 당하는 환란을 만났지만 감옥에 갇혀있는 가운데에서도 선조의 알아주는 은덕(恩德)을 입었다.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의 군대를 도와 삼경(三京)을 수복(收復)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초연히 승복(僧服)을 입고 마침내 예전에 지내던 절로 돌아왔다. 대사의 몸과 마음은 구름과 달처럼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으며, 다시 선정(禪定)을 닦아 진실무착(眞實無着)하여 번뇌(煩惱)의 굴레를 벗어난 정토(淨土)를 관조(觀照)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영웅의 풍도(風度)는 무너진 풍속을 깨트리고 나약(懦弱)한 자와 완악(頑惡)한 자를 세우기에 충분하였으니, 지난 시대에서 찾아보아도 더불어 대사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를 밝혀서 효도를 넓히고 이를 가지런히 하여 충성을 구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의승(義僧)이었으나 뜻은 공리(功利)에 있었다. 그러니 마음과 자취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또한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아! 지금 세상에 모든 승려를 통틀어보아도 기이하고 준걸(俊傑)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교에 몸담고서 기꺼이 허무적멸(虛無寂滅) 속에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있는 자가 무릇 몇 사람이겠는가? 만약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위급한 상황을 당하여서 불교의 계율(戒律)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대의(大義)에 힘써서 우뚝하게 대사가 했던 것처럼 공로를 수립한다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장차 어떠하겠으며, 또 이교(異敎)라고해서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사가 입적한 지 이제 수백 년이 되어 조정(朝廷)이 특별히 표창하는 은전(恩典)을 내리는 것은 풍교(風敎)를 수립하고 인심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남붕(南鵬)스님은 힘쓸지어다.

대사의 문장(文章), 학문의 경지(境地), 의발(衣鉢)의 전수(傳授), 법파(法派)는 문충공이 지은 비문 안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생졸(生卒)과 출처(出處)의 시종(始終), 의병을 일으켜서 난리를 평정한 전말(顚末)에 대해서만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와 같이 명(銘)한다.

巖瀆毓精異人挺形 仙婆告夢神翁錫名 字雖?胎性則佛英 神秀氣淑髓綠骨靑 암독육정이인정형 선파고몽신옹석명 자수아태성칙불영 신수기숙수녹골청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받아 남과 달리 모습 빼어났네.신선 할미 꿈에서 점지(點指)하고 신비한 노인 이름을 지어주었네.아리따운 몸에 잉태(孕胎)하였으나 불가(佛家)의 영명(英明)한 성품 지녔네.정신은 빼어나고 기운은 맑으며 기골(氣骨)이 준수(俊秀)하였네.

金?放光玉拂奏靈 道悟那羅理感死生 遂登法席摩尼照晶 無妄??詩達天庭 김비방광옥불주령 도오나라리감사생 수등법석마니조정 무망류설시달천정

금 빗(金?)으로 광명을 내고 옥 먼지떨이(玉拂)로 신령(神靈)을 모았네.나라(那羅)의 도리를 깨달았고 사생(死生)의 이치를 느끼었네.마침내 법석(法席)에 오르니 마니주(摩尼珠)가 중생(衆生)을 비추었네.뜻밖에 감옥에 갇혔으나 대사의 시(詩) 성상(聖上)께 진달(進達)되었네.

恩隆御畵榮耀千齡 口呪梵音志在葵傾 逮國屯步先唱義聲 登壇誓衆雲集其兵 은륭어화영요천령 구주범음지재규경 체국둔보선창의성 등단서중운집기병

성상께서 손수 그린 그림 내려주는 은전을 입으니 영광이 천추에 빛나네.입으로는 불경(佛經)을 외우지만 뜻은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데 있었네.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미치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네.단(壇)에 올라가서 대중(大衆)에게 맹세하니 병사들 구름처럼 모였네.

羽翼天戈掃彼穢腥 鼓勇迎?復我王京 忠義炳日華夷皆驚 功成納印歸錫雲? 우익천과소피예성 고용영란복아왕경 충의병일화이개경 공성납인귀석운경

명나라의 군대 도와 저 더러운 왜적을 소탕하였네.용기를 북돋아 어가(御駕)를 맞이하여 우리 수도(首都)로 돌아왔네.충의(忠義)가 해처럼 빛나니 중국과 오랑캐 모두 놀랐네.공(功)을 이룬 뒤 벼슬을 버리고 구름 낀 산사(山寺)로 돌아왔네.

曇雲生鉢法月在甁 三夢舊偈玄契?? 人間榮辱幻如夢醒 舍珠靈骨寶塔?嶸 담운생발법월재병 삼몽구게현계정녕 인간영욕환여몽성 사주령골보탑쟁영

담운(曇雲)은 바리(鉢)에서 생기고 법월(法月)은 병 속에 있네.삼몽사(三夢詞) 지어 읊은 옛날의 게송(偈頌) 또한 오래도록 빛날 만하네.인간 세상의 영화(榮華)와 치욕(恥辱)은 꿈같은 환상이라는 것 알았네.사리(舍利) 구슬 신령하고 부도(浮屠) 탑 우뚝 솟아있네.

太古法派不滅光明 靈鷲立祠表揚忠貞 一?同祭師弟共享 功紀麟臺道尊龍堂 태고법파불멸광명 영축립사표양충정 일체동제사제공향 공기린대도존룡당

태고보우의 법맥(法脈)과 광명(光明)이 사라지지 않았네.영축산에 사당 세워 충정(忠貞)을 드러내었네.일체 같이 제사하니 스승과 제자 함께 흠향하네.공(功)은 공신각(功臣閣)에 기록되고 도(道)는 불당(佛堂)에서 존숭되었네.

一片貞珉万代留芳일편정민만대류방

한 조각 곧은 돌에 만대(萬代)토록 아름다운 이름 남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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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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